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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소식통

김득구

by q8393 2011. 1. 11.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184

김득구 아들 꼭 만나고 싶다, 치대 다닌다니 고마워”

‘비운의 복서’ 김득구와 싸웠던 레이 맨시니, 28년 만에 입 열다

샌타모니카=LA중앙일보 원용석 기자 won@joongang.co.kr | 제200호 | 20110108 입력
레이 맨시니가 샌타모니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매년 11월만 되면 그때 생각이 나 울적해진다. 11월 13일에는 김득구와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LA중앙일보=김상진 기자
“마지막 펀치가 치명타였습니다.”
김득구의 뇌수술을 집도한 로니 함그렘 박사는 김득구가 뇌사 상태에 빠져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레이 맨시니는 순간 자신의 두 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말 내 손에 사람이 죽었단 말인가.”

1982 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특설 링. WBA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 챔피언은 미국의 레이 맨시니. 도전자는 한국의 김득구. 두 선수는 시작부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향해 연방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라운드가 지나갈수록 김득구의 몸놀림이 둔해졌다.
그리고 14회. 공이 울리자 맨시니는 카운터블로에 이은 강력한 레프트 훅을 날렸다. 김득구가 비틀거리는 순간 맨시니는 가차 없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김득구의 턱에 작렬시켰다. 함그렘 박사가 말했던 그 ‘마지막 펀치’였다.

심판은 양팔을 크게 흔들며 카운트아웃을 선언했고, 김득구는 다시 링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4일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배 고팠던 시절, 헝그리 복서의 죽음 앞에 한국민은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이 가난을 물려준 자신 때문이라고 비관한 그의 어머니는 3개월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경기 주심이었던 리처드 그린도 책임을 느끼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7개월 뒤 자살했다. 맨시니도 ‘사람 죽인 복서’라는 비난을 받으며 역시 우울증에 빠졌다. 한국에 와 김득구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는 한동안 복싱계를 떠났다 돌아왔지만 더 이상 폭풍처럼 몰아치던 인파이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김득구가 KO당하는 순간. 이 경기 주심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위 사진) 김득구의 아들 지완 군의 갓난아기 때 모습. [중앙포토]
지 난해 11월, 김득구 사망 28주년을 맞아 맨시니와 접촉을 시도했다. 마흔아홉 살인 그는 영화배우 겸 제작자로서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다음 달에 만나면 안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12월 9일 샌타모니카에 있는 그의 영화 사무실 앞에서 맨시니를 만났다. 그는 미안하다며 “11월만 되면 기분이 우울해져 조용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인터뷰를 미룬 이유를 밝혔다. 샌타모니카에서 아내,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와인을 마시면서 김득구와의 대결,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해 하나 둘씩 얘기를 꺼냈다.

“누구에게나 즐거움 주는 영화가 좋아”
-복싱계를 은퇴한 뒤 뭘 하며 지냈나.
“1980년대 중반 영화업계에 뛰어들었다. 영화배우 겸 제작자로 활동했다. 현재 ‘챔피언 픽처스’라는 독립영화 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영화를 사랑한다. 와인과 시가 사업도 한다.”

-영화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평소 영화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특히 김득구 사건 이후 방황한 뒤 영화를 통해 새 삶을 찾았다. 복싱은 승패로 희비가 갈리지만 영화는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데 큰 매력이 있다.”

-배우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1998년에 복싱영화 ‘보디 앤드 소울(Body and Soul)’에서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플래시 댄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제니퍼 빌스와 함께한 작품이다. 총 25개 작품에 출연했다.”

-2002년에는 김득구 사망을 영화화한 ‘챔피언’ 시사회에도 참석했는데

.....

(생략)

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