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사는 소식통

IMF 취업난 세대, 또 찾아온 저주

by soulfree 2008. 12. 27.
아이가 커가는데?
쩝...
10년전에 IMF 상황때문에 경제상황이 어려워져서 놓쳤던 혼기... 다시 한번 잡아보려는데 또 다시 이런 상황이 온 사람들과 어렵게 결혼해서 아이들 한참 커가는데 이런 상황이 온 사람들... 둘 중에서 어떤 경우가 더 불행한걸까?
기사 속 이야기는 내 세대의 이야기다.
저주받은 세대?
지금 대학 졸업반인 세대도 우리 세대와 같은 저주받은 세대가 되었군...
10년전에 대학 입학을 했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저주받은 세대라고 했었다.
그럼... 이 나라에 태어나 공부하고 취업하는게 모두 저주일까?
자신들이 '저주받은 세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들을 가보면 '젠장~ 정말 저주받은 인생이군~!'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중국 공장들 시찰하고 다니다 보면 '그래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네~'라고 생각하게 될거다.
이라크나 가자 지구의 현실을 본다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주'라는 말이 쏙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넓게 생각해보면 '저주'라는 것조차 너무나 상대적이지만...
요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아무리 난리를 쳤다한들 이렇게까지 나빠질만한 상황까지는 아니었고 이렇게 쉽게 내려앉을만한 나라는 아니었던것 같은데 이렇게 되어서 황당하단 말이지...
'불황' 정도에서 끝났어야 할 상황이 'IMF환란에 버금가는' 정도까지 되어서 너무너무 황당하단 말이지...

10년전에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썼고
그 후로도 꾸준히 한 무물만 묵묵히 판 덕분일지 몰라도 이 환란의 상황에서도 다행히(?) 살아남아 있는 나는 덜 불행한걸까?
내 분신같은 사람들은 많이 떠났을 망정 이렇게 내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전부 다 안타깝고... 안쓰럽고... 마음이 아플 뿐이다...

IMF 취업난 세대, 또 찾아온 저주
기사출처>>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329693.html
졸업문턱에 외환위기로 취업시장 전전
어느덧 30대 중반…이번엔 금융위기
“결국 임금동결…아이 커가는데 한숨만”


1997년 성탄절에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사람들은‘크리마스 선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저주의 신호탄’이었다. 그들은 외환위기 직후 혹독한 취업난을 함께 겪은 ‘아이엠에프 세대’들이다. 지금은 30대 중후반, 우리 사회 중추를 이루고 있는 이들이 외환위기 때 못지않은 시련을 맞고 있다. 11년 만에 다시 찾아온 위기다.

■ 국가부도 위기 97년 겨울은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이효민(37·가명)씨에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현재 신용카드사에 몸담고 있는 이씨는 졸업 동기생들끼리 만나면‘저주받은 세대’라고 자조한다. 이씨는 졸업을 석 달쯤 앞둔 1997년 12월 말 조그마한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다. 첫 출근날 텔레비전에선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와 임창열 경제 부총리가 악수하는 화면이 흘러나왔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건 느끼고 있었죠. 당장 과사무실에선 입사 요청서가 뚝 끊어졌으니까요. 그래도 ‘나랏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었어요. 위기, 위기 했지만, 내 일 같지 않게 느꼈죠. 전 취직도 했고 …. 아이엠에프 총재가 방한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뭔가 돌파구가 마련되나 보다 했죠.”

■ 구사일생 상황은 급변했다. 열흘쯤 출근했을까. 회사 상사가 쉬라고 언질을 줬다. 이씨는 그렇게 첫 일자리와 이별을 해야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젊었다. 노동부 취업지원센터(현 고용안정센터)를 내 집 드나들듯 다녔고, 채용공고를 찾아 신문을 샅샅이 읽었다.

“정말 부리나케 뛰어다녔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두려워지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생각했던, 아니 선배들이 다니던 괜찮은 ‘잡’(일자리)은 없었어요. 졸업(98년 2월)은 다가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전공(통계학)과 무관한 조그만 건설사에서 가까스로 일자리를 찾았다. 대학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형님’들의 조언으로 따놓은 전기설비·소방설비 자격증이 호구지책이 됐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백수’로 지내는 동기들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 끊임없는 방황 호구지책으로 마련한 일자리는 이씨의 머리와 마음까지 채워주진 못했다. 99년 초 1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서울의 한 컴퓨터학원에 들어갔다. 전산 공부를 위해서였다. 당시 정부가 대대적인 정보기술(IT) 산업 육성프로그램을 마련한 게 계기였다.

“저처럼 컴퓨터와는 담 쌓은 사람들도 학원에 부지기수로 몰렸어요. 세 번이나 떨어진 뒤에야 학원에 들어온 사람도 있었죠. 전산 붐이었죠. 나라에서 아이티 산업 육성한다고 하니 좋은 일자리는 거기밖에 없다고들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전산 쪽에도 괜찮은 일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년 동안 세 번 직장을 옮겼다. 회사를 키우기보단 정부 보조금만 챙기는 곳이 태반이었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직장을 옮기다 보니 패배감에 젖어들었다. 여자친구마저 떠나갔다.

“당시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뭔지 아세요? 방안 커튼을 모두 내린 채 이불 뒤집어 쓰고 유투(U2)의 ‘사랑이여 나를 구원하소서’(Love Rescue Me)를 반복적으로 듣는 거였어요. 비싼 돈 들여 대학까지 나왔는데, 변변한 일자리도 못 찾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저 자신이 미웠어요. 패배의식요? 저도 모르게 그런 게 생기더라고요.”

■ 되살아나는 악몽 2003년에 지금 몸담고 있는 카드회사의 경력직 공채에 합격해 둥지를 틀었다. 그 사이 경제적 형편도 나아지고 결혼도 해 18개월 된 딸아이를 둔 가장이 됐다. 그런데 최근 외환위기 직후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97년 위기가 취업난으로 다가왔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이씨에게‘임금동결’로 현실화하고 있다.

“몸이 편찮으신 부모님이 걱정이긴 하지만 안정을 찾았다 싶었어요. 그런데 ‘서브프라임 사태’니 뭐니 하더니 또 금융위기가 오더라고요. 제 인생엔 다시는 없기를 기원했는데도 말이죠. 회사는 당장 임금을 동결시켰어요. 아이들한테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걱정입니다.”

이씨는 요즘 외벌이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인지 싶다. “결혼한 지 3년이 넘도록 아이가 안 생겨 아내더러 직장을 그만두게 한 게 잘한 일인지, 요즘 들어 괜히 후회가 돼요. 직장을 그만둔 덕택에 아이가 생긴 것은 축복이지만, 외벌이를 하다 보니 돈이 안 모여요. 노후는커녕 힘들게 얻은 딸아이 뒷바라지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 다시 꿈을 찾아서 외환위기 때 그랬던 것처럼 돌파구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이씨는 요즘 내집 장만의 꿈이 이뤄질 것 같은 기대로 즐거워하고 있다. “경기침체가 좋은 점도 있더라고요. 불과 1년 전만 해도 집값이 너무 비싸 내집 마련은 영영 어려울 줄 알았는데, 금융위기 덕택에 희망이 보입니다. 아직 모아놓은 돈은 부족하지만 저한테도 한번쯤 기회가 있겠죠. 전세 6천만원 집에 평생 살 수는 없잖아요. 아이도 커가는데 ….”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