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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ど) Empathy

첫째와 고양이

by soulfree 2009. 4. 14.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양이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을 설명하자면,
독립적이다, 도도하다, 사람 말을 안듣는다, 영물이다, 눈이 무섭다,
정도일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외로운 게 싫다며 애완동물을 들인다고 할 때
고양이를 주로 추천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주인을 사랑해 마지않는 충성스러운 개들은
일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쁜 주인을 기다리며 혼자 집에 있다 보면 우울증까지 걸린다지 않는가.
그에 비해 고양이는 혼자서도 외로움 안 타고 알아서 잘 노니까
혼자 키우기에는 고양이가 딱이라고,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입을 모은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제 앞가림 알아서 잘 하고 집도 혼자 잘 본다며 어른들께 이쁨 받던 첫째는
허울 좋은 어른들의 칭찬이 지나가고 나면, 그 칭찬을 지키기 위해 혼자 조용히 어린이 대백과사전이나 펄럭이고 있어야 했다.
어쩌다 한 번 서러워 눈물이 나려다가도,
어린애처럼 징징대다간 첫째의 가치를 지킬 수 없을 것만 같아 혼자서 콧물 섞인 눈물을 여러 번이나 삼켰다.
하지만 바보 같은 어른들은 갸륵한 첫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첫째의 첫째다움에 점점 익숙해져 가곤 했다.

분명 학교에서 배우는 슬기로운 생활이나
엄마가 읽어주는 전래동화에서는
혼자 자기의 어려움을 감내하고 견뎌내는 아이에게 광명이 찾아왔는데,
현실에선 어쩐지 빽빽 울며 떼쓰는 미운 아이 입에만 떡이 들어갔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 후에도,
연인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성실한 첫째보다,
조잘조잘 말도 많고 질투도 많고 사건도 많은 어딘가의 막내랑 항상 바람이 나는 것이다.

떡 얻어먹기 힘들었던 집에서 드디어 독립해 자신의 공간을 꾸몄을 때 첫째는
자기의 귀가를 반겨줄 고양이를 한 마리 들였다.
하얀 털을 가진 도도한 페르시안은 그녀가 출근할 때도 귀가할 때도
변함없는 조용한 얼굴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첫째가 모든 걸 알게 된 건 2년이 지나 갈색 친칠라 한 마리를 새로 들여왔을 때였다.
항상 창가에서 고고하게 거리를 내려다보고만 있던 하얀 페르시안이
그 작은 고양이와 함께 얼마나 활기차게 뛰어다니는지,
하루 종일 둘이 야옹댈 정도로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갈색 친칠라를 바라보며 그 차분한 눈이 얼마나 수선스럽게 빛나는지.

첫째에게도, 하얀 페르시안에게도
이제 그만 독립적이고 도도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글출처>>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 호란의 Tea Break 게시판, 13/Apr/2009 (월)
http://home.ebs.co.kr/wizard/wizard/frames/frames_ext.jsp?prog_id=BP0PHPK0000000022&client_id=musictravel


난 첫째가 아닌데도 저 글에 공감이 가.
어제 라디오로 저 글을 들으며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저 어딘가 숨어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거나 4차원을 오가며 노는것에 익숙했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부모님께 난 '뭐든 혼자 알아서 잘 해내는 의젓하고 믿음직한 착한 큰 딸'이 되었던거다.
때때로 '왜 난 첫째도 아닌데 이래야해?' 이러면서 나름 억울하다 생각할때도 있었지...
어릴적에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던 이유도 저런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들에게만 겨우겨우 마음을 열어서 그런게 아니었나 싶어.

나도 누군가가 내게
 "이제 범생이 노릇 그만해도 돼.
그 동안 얼마나 수고로웠니?
이제 그만 너도 편해졌으면 좋겠어"
라고 말해주길 바래왔던 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되었지...
그렇게 나를 속속들이 알아봐주는 이는 아주아주 드물다는걸...
그걸 기다리기엔 내가 너무 지쳤다는걸...
저렇게 말해줄 누군가는 쉽게 나타나지 않아.
이제 그만 기다리고 나 스스로 이제 그만해도 좋다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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