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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 웅얼웅얼-Q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by q8393 2010. 6. 10.
혹시 지난번에 정은님께서 물어보신 이유가 이 책때문이였을까? ^^a
이 기사를 보니, 정은님 생각이 .....

우연히 아줌마들 사이트에서 히틀러얘기가 나온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관계됐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글쎄...?  
여기서는 히틀러에 관해서라면, 정말 책도 방송도 많고, 애고 어른이고 똑똑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그야말로 1등부터 꼴찌까지 다관심이 있달지,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평범한? 서민들 경우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뭐 그냥 이 광고만 봐서는... 약간은 흥미를 위해서 더 둘의 관계랄까,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히틀러의
입장을 강조한것처럼도 보이고...  적어도 광고는 그렇게 난듯;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의 학문내용과는 아무관계도 없어보인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
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더이상 가지는 않지만...

재밌달까 웃기는 것은, 사진에서 히틀러 어릴때 조그만 사진이지만, 너무 닮았다. ㅎㅎ
비트겐슈타인은 저때부터 미남이였는가~ ㅡ.ㅡ
 

<히틀러가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서 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레알슐레에서 나는 분명히 유대인 소년을 한 명 만났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우리가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그가 경솔하다고 의심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틀러 저작 '나의 투쟁' 중)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자신이 지독하게 유대인을 혐오하게 된 원인에 대해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린츠의 국립실업학교 레알슐레에서 한 유대 소년을 만났다고 언급한다.

그 소년은 항상 말끔한 차림새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소년은 가문의 부와 권세, 문화계에서의 영향력을 뽐냈다. 히틀러는 그에게 '자우유트(Saujud.더러운 유대인)'라고 소리쳤다.

소년 히틀러에게 반유대주의의 씨앗을 심은 유대인 소년은 누구였을까?

호주 작가 킴벌리 코니시는 최근 번역ㆍ출간된 저작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그린비)'에서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그 유대인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은 둘 다 1889년 4월생이다. 히틀러 표준전기에 따르면 히틀러는 1900년 9월부터 1904년까지 레알슐레에 다녔으며 비트겐슈타인은 1903년부터 레알슐레의 남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코니시는 독일 코블렌츠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든다. 1904년에 찍은 레알슐레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히틀러의 어린시절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에서 코니시는 비트겐슈타인을 지목했다.

팔짱을 끼고 오른 쪽 맨 위에 앉은 히틀러의 바로 한 줄 아래, 오른쪽에서 3번째에 앉은 소년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것.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거리는 불과 1m도 되지 않는다.

코니시는 사진 속의 어린 소년과 성인 비트겐슈타인의 사진을 대조했고 빅토리아 경찰국 신원확인과는 두 인물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어린시절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의 공통 관심사는 바그너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통째로 외웠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히틀러도 무척 좋아한 오페라였다. 히틀러는 휘파람으로 모든 곡조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의 집안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히틀러의 집안은 그의 음악과 미술에 대한 관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 가(家)는 카네기, 로스차일드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재력가였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1903년 열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전시회를 후원했고, 브람스를 저택으로 초청해 연주회를 열었다.

저자는 "유럽에 뿌리 내린 반유대정서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증오는 사실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주식시장을 조작하고 독일의 부를 독차지했으며 예술을 타락시켰다고 몰아붙였지만 보통의 유대인은 평범한 독일인과 다를 바 없었다.

권력을 잡은 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제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린츠에 '아돌프 히틀러 박물관'을 세워 각지에서 약탈한 예술품을 보관했다. 또 린츠에 헤르만 괴링 제철소를 세우고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제철소를 흡수했다.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느낀 상대적 박탈감과 질투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히틀러가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대인 대학살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없었을지도 모른다.

남경태 옮김. 455쪽. 1만8천원.

kind3@yna.co.kr

(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686129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킴벌리 코니시 지음

‘레알슐레(오스트리아 린츠의 국립실업학교)에서 나는 한 유대인 소년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우리가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그가 경솔하다고 의심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이 소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말끔한 옷차림에 다른 아이들은 잘 쓰지 않는 점잖은 말씨에 친구도 사귀지 않는 ‘왕따’였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히틀러가 어린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을 훗날 자서전에서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킴벌리 코니시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는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히틀러에게는 없었던 문화적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히 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그것을 충분히 누릴 만한 여건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철강업으로 재계를 주물렀던 바트겐슈타인 가문은 1903년 클림트가 창설한 예술단체인 분리파의 전시회를 후원하고, 브람스를 집으로 불러 연주회를 가질 만큼 예술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 히틀러는 오페라 ‘로엔그린’의 가사를 모두 외울 만큼 작곡가 바그너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부인 코지마 바그너가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에 의해 어머니로부터 헤어져 멀리 떠나야 했다는 악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문의 배경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던 비트겐슈타인은 히틀러가 언급한 대로 ‘경솔한’ 존재였고, 평생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당시 유럽에 뿌리 내린 반유대정서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20세기 최대의 만행으로 꼽히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사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증오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제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린츠에 ‘아돌프 히틀러 박물관’을 세운다. 또 이 도시에 헤르만 괴링 제철소를 세우고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비트코비츠 제철소를 흡수했다.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느낀 상대적 박탈감과 질투에 대한 복수였다는 것이다.1만 8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706023009

[읽어보세요]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外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킴벌리 코니시 지음ㆍ남경태 옮김
히틀러를 주눅들게한 비트겐슈타인

히틀러는 왜 유대인을 학살했을까. 10대 시절 학교에서 만난 한 유대인 소년이 증오의 불을 질렀다? 훗날 위대한 철학자가 된 그 소년, 비트겐슈타인은 부잣집 아들인데다 너무 잘 나서 왕따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 둘 사이에 벌어진 은밀하고도 격렬한 투쟁을 소설 형식으로 쓴 역사 교양서다. 그들에게 영향을 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등 당대 유럽의 지성과 시대의 맥락을 펼쳐보임으로써 반유대주의의 뿌리를 추적한다. 그린비 발행ㆍ456쪽ㆍ1만8,000원

▲나는 기생이다/정병설 지음
시문으로본기생의 삶과 생활

기생은 조선사회의 모순을 대변한다. 욕망의 절제를 강조한 유교 사회에서 기생은 오히려 번성했던 욕망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천민이지만 교양과 기예를 뽐내야 하는 기생의 존재 자체도 모순이다. 황진이, 매창 등이 남긴 시조나 신윤복의 그림 외에 기생의 삶을 보여주는 자료는 흔치 않다. 서울대에서 한국 고전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저자는 기생들이 남긴 시문을 통해 그들의 실상을 들여다본다. ‘기생도 사람’이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문학동네 발행ㆍ392쪽ㆍ1만5,000원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ㆍ추선영 옮김
자본주의가 생태계를 위협한다

환경 위기의 시대, 이윤 추구 사회에 던지는 12편의 생태 에세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환경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지은이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생태학과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결책은 단 하나, ‘탈자본주의’뿐이라고 강조한다. 지구온난화, 유해 폐기물 수출 등 구체적 쟁점을 다루면서, 분명하게 자기 입장을 밝힌다. 계급 갈등을 무시한 환경보호론 등 환경운동 내부의 문제점도 강력 비판한다. 책갈피 발행ㆍ288쪽ㆍ1만원

▲만엔 원년의 풋볼/오에 겐자부로 지음ㆍ박유하 옮김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대표작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1860년 만엔원년(万延元年)에 일본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사건의 기억이 이후 어떻게 모습을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치며 이어져 오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제 2차 세계대전, 격렬한 학생운동의 시기였던 1960년대로 시간 무대가 변하면서 폭력, 상처와 치유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보여준다. 상처로 남은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진정한 이해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웅진지식하우스 발행ㆍ528쪽ㆍ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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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7/h2007070617452984210.htm

이거찾아보다가, 덤으로 생태계의 파괴자... 라는 책을 발견했네. 약간 흥미로워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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