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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고 웅얼웅얼

'봄날은 간다'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by soulfree 2004. 8. 6.
내가 참 좋아하던 기사를 여기에 옮긴다...

단편 '따로 또같이'를 보고나서... 계속 허진호표 잔상을 경험하고 있다가

문득 '봄날은 간다'를 본 4명의 여인네들의 각각의 감상과 시선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나서...

여기에 옮겨본다...

 

"은수가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자고 할 때, 상우가 “내가 잘할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몇줄 뒤에 앉아 있는 홍보 책임자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크게 훌쩍였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나중에 상우가 슬픔에 빠져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이처럼 ‘사나이’가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이 나온 영화를 본 기억이, 최소한 아시아권 영화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상처를 입기 쉬운 순간의 사람들에 대한 진솔하고 성실한 초상, 이것이야말로 허진호 감독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지점이다."

 

정말이다...

'따로 또 같이' 역시 그 짧은 순간에도 허진호라는 사람의 심금을 제대로 울린다...

함께했던 일상의 회상...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이보다 더 저릿한 기억이 있을까?

 

기사출처: 씨네21 http://www.cine21.co.kr/kisa/sec-002100102/2001/10/0110121005441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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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는 `내 친구 허진호`와 똑같았다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

<금지옥엽> <첨밀밀> <아이니아이워> 등을 통해 감성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려온 홍콩의 진가신 감독은 허진호 감독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가 허 감독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비행기 안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였다.

몇 개월 뒤 그는 한국을 찾아 허진호 감독을 만나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영화사 어플로즈 픽처스를 통해 이 영화에 투자를 결정했고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배급을 약속받았다. 투자자인 그가 <봄날은 간다>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편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감성의 감독이자 아시아영화계의 동료로서 이 영화에 대한 ‘가슴으로부터 쓰는’ 감상문을 보내왔기에 여기에 싣게 됐다. 편집자


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며, 영화평론가가 될 만큼 분석적이지도 않다. <봄날은 간다>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느꼈던 부담은 시나리오를 쓸 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결국 떠오르는 대로 혹은 가슴에서 나오는 대로 쓰기로 결심했다.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순 없다. 내 영화사가 이 프로젝트에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나리오를 이미 읽었고, 초반 편집본도 봤으며, 2년 전에는 서울에서 허진호 감독을 만나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했다. 물론 그 작품은 바로 <봄날은 간다>였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그리고 들었던 어떤 것도 어제 아침 큰 스크린을 통해 본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영화는 쉽게 찾아왔다가 예기치 않게 사라지는 사랑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의 출렁임을 정말 충실하게 따라간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주제의 영화, 노래, 시 등에 이끌려왔다. 재밌는 점은 제작 초기 시나리오를 보거나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때는, 이 작품이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도무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감독의 시선을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큰 스크린에서 실제로 봐야 하는 또다른 이유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처럼 허진호 감독은 ‘천천히’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영화 전반부를 할애한다. 이는 후반부에서 상우와 은수가 겪는 고통과 슬픔을 관객이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은수가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자고 할 때, 상우가 “내가 잘할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몇줄 뒤에 앉아 있는 홍보 책임자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크게 훌쩍였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나중에 상우가 슬픔에 빠져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이처럼 ‘사나이’가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이 나온 영화를 본 기억이, 최소한 아시아권 영화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상처를 입기 쉬운 순간의 사람들에 대한 진솔하고 성실한 초상, 이것이야말로 허진호 감독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지점이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롱테이크 사용에 매료돼왔다. 그의 롱테이크에는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실성과 연출된 바의 묘한 조화가 있다. 이 완전무결한 균형은 천재의 솜씨이거나 뛰어난 장인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서 기인한 것일 터. 허우샤오시엔 같은 다른 롱테이크 거장과는 달리 허진호 감독의 롱테이크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와이드숏은, 실제로는 캐릭터들을 가까이서 찍지 않는데도 마치 클로즈업으로 찍는 것처럼 그들의 표정을 느끼게 한다.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부분에서 상우와 은수가 결국 헤어지는 장면은 이 경우의 완벽한 예라 할 수 있다. 3∼4분은 족히 될 이 테이크의 대부분에 걸쳐 은수는 초점 밖으로 빠져 있고, 절반 정도의 시간 동안 상우는 카메라를 등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봤다.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최근 2년 사이에 허진호 감독은 나의 좋은 친구가 됐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진정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훌륭한 감독치고 인간성까지 좋은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영화를 그토록 좋아하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유지태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속 자아임에 틀림없는 상우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는 허진호 감독의 모습, 말투, 걸음걸이, 웃음, 심지어 술 취한 모습까지 너무 잘 잡아냈다. 내게는 옛 친구를 두 시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것 같았다. 상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허진호 감독도 분명 좋아하게 될 것이다.

방금 전의 이야기는 물론 이 영화와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이 글도 영화평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가슴으로부터 쓰고 있는 것이다.

 

진가신/ 어플로즈 픽처스 공동대표·영화감독·<첨밀밀>



 

기사출처: 씨네21 http://www.cine21.co.kr/kisa/sec-002100102/2001/10/0110121006401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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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심영섭씨의 글은 별로 안좋아한다...^^

 

"어쩌면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와 소리를 흘려버리는 여자는 애초에 각기 다른 궤도에서 돌다 스치는 별의 운명 외에는, 허락된 사랑이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상우는 은수와 사랑을 시작하자 자꾸자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그때 강릉이란 공간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듯 영원한 어떤 것, 겨울의 눈 속에서도 되살아나는 대숲과 봄날의 햇살에서도 파릇한 무덤의 이미지이다.

사랑의 확신 속에 봄은 찾아들고 은수와 상우는 “우리도 묻히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미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근데 좀 늦게 오신 것 같네요’라고""""

 

마룻장의 미장센, 허전하고 윤기 도는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한달만 떨어져 있어 보자.” 헤어짐에 유효기간을 두고 소멸되어가는 사랑을 지켜볼 수 있는 쪽은 언제나 덜 사랑하는 사람쪽이다. “난 너랑 못 헤어져. 난 헤어지는 거 생각해본 적 없어.”

허진호는 사랑이 올 때는 대숲소리, 잔물소리, 인경소리를 택하더니 사랑이 몰려나갈 때는 파도소리를 택한다.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의 부서짐. <봄날은 간다>는 그렇게 공간으로 만남을 이야기하고 시간의 공기로 빈자리를 채우며, 계절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의 섭리처럼 막을 수도 채울 수도 없다는 것. 그는 이번에는 사진 대신 소리를 잡으려 부질없는 손짓을 허공에 휘젓는다. 그때마다 허진호라는 지휘자의 손짓에 갈피갈피 묻어둔 빛바랜 기억의 음표들이 공기중을 떠돌다 사그라진다.

어쩌면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와 소리를 흘려버리는 여자는 애초에 각기 다른 궤도에서 돌다 스치는 별의 운명 외에는, 허락된 사랑이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상우는 은수와 사랑을 시작하자 자꾸자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그때 강릉이란 공간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듯 영원한 어떤 것, 겨울의 눈 속에서도 되살아나는 대숲과 봄날의 햇살에서도 파릇한 무덤의 이미지이다. 사랑의 확신 속에 봄은 찾아들고 은수와 상우는 “우리도 묻히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미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근데 좀 늦게 오신 것 같네요’라고.

사실 할머니와 은수는 한번도 같은 공간 속에 만난 적이 없다. <8월…> 때도 그랬다. 다림이와 정원의 아버지는 만난 적이 없는 타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남자 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허진호는 그 보이지 않는 고리에 기다림과 그리움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안타까워하던 상우에게, 할머니는 사랑하는 이와의 불운했던 기억을 비워냄으로써 기다림과 그리움에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상우는 심장보다 손을 높게 두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법도 할머니에게서 배웠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라면과 일회용 커피라는 인스턴트화되고 뿌리내리지 못하는 은수의 사랑에 대비되는 아주 오래 묵혀 미움조차도 삭혀낸 사랑.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노부부의 뒤에도 보리밭에서 소리를 채집하는 상우의 등뒤에도 서 있는 건 바로 그런 큰 나무였다. 묵묵한 세월의 나무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나이테를 속 깊이 감춘다. 그때 소리는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바람이 되고, 화분을 내밀던 은수도 실은 그런 큰 나무를 가꾸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깊은 슬픔의 꽃을 피우기 위해 허진호의 영화는 얼마나 많은 양지들을 펼쳐 놓았던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강릉에서 오는 상우의 우는 모습은, 집에 와서도 커튼을 치고 흐느끼며 누워 있는 상우는 그렇게 음지였다. 깊은 슬픔의 웅덩이였다. 김영랑의 시구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 같은 허진호의 영화들에서 다시 한번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느낀다. 다다미 미장센에 버금가게 허전하면서도 맑은 윤기가 나는 마룻장 미장센이 있는 영화세상을.

아마도 오즈의 다다미가 밖에서 안을 보는 자리라면 허진호의 마루는 안에서 밖을 보는 자리일 것이다. 그 자리는 올 것 같아서 기다려지는 자리, 내가 떠나서 남겨지는 삶의 무게가 조금은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자리. 그리하여 그 마루는 허진호가 아무리 내밀한 개인적인 관계에 천착해도 여전히 가족이 있는 그 허전한 여백으로 되돌아오리라는 약속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쉼없이 세월을 흘려버려도 허진호의 그 닫힌 우주에서는 아무도 타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실의 바다에서 묵묵히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리며, 정작 감독이 가장 많이 마음을 준 사람은 혹시 할머니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왜냐하면 허진호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움직인다는 것은 일종의 자그마한 사건이고 소중한 고백 같은 것인데, 카메라는 은수보다 오히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할머니의 육신이 빠져나간 흰 고무신을 쓰다듬듯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문득 삼년 전 겨울 생각이 난다. 우리 아이를 헤어진 남편에게 보내고 구정날,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러 동네의 변두리 극장을 찾았었다. 그날 따라 극장은 보기 드물게 붐볐고, 사람들은 가족끼리 손을 잡고 와서는 ‘심은하가 이뻤고, 한석규가 잘했다’고 소곤대며 극장문을 나섰다. 천호동에서 암사동까지 걸어서 집에 돌아갔는데, 도중에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천원짜리 비디오도 샀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난 영화평론가가 아니었다. 그뒤론 잠이 잘 안 오는 밤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켜놓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정원이가 아버지에게 비디오 트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지나면 언제나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추석이 되고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이제는 ‘내 생애 단 하루뿐인 특별한 날’ 대신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그렇게 천천히 나의 심장박동과 그의 호흡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먼 훗날 <봄날은 간다>는 내게 사랑보다는 사랑의 자세에 관한 영화로 남게 될 것만 같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봄날은 지금도 흘러간다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사람들이 왜 안 일어나지? 엔딩 자막이 올라간 뒤 내가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옆사람에게 귀엣말로 속삭인 첫말이다. 우리는 그러고도 잠시 한동안 더 앉아 있어야 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는 관객 사이를 나는 볼일 다 봤어요, 하며 턱턱 걸어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은 겨울날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그 정적이 영화가 끝난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흘러다니고 있었다.

그뒤 며칠, 혼자 있을 때, 계단을 오를 때, 현관문을 딸 때, 거실에서 내 작업실로 걸어올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고 혹은 꽃이 피면 함께 웃고 꽃이 지면 함께 울던- 이라고 습관처럼 허밍을 넣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정적과 입 안에서 맴도는 쓸쓸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허밍.

허진호의 영화 속엔 제목에서부터 시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그렇고 <봄날은 간다>, 가 그렇다. 앞의 작품에서는 겨울까지 기다릴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인해 분침의 째깍거리는 소리까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은 운명의 시간이 존재하고, 뒤의 작품에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여일하게 흘러가고 있는 일상의 시간이 존재한다. 앞의 작품에서 시간은 사진관에 붙어 있는 사진처럼 붙박혀 고여 있고, 뒤의 작품에서 시간은 갈대밭을 쏴아 소리내며 지나가는 바람처럼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허진호처럼 주제와 주인공의 직업을 딱 맞아떨어지게 포착해내는 감독도 드물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운명에 맞서며 혹은 일상에 마모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장면이 곧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 되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일은 소리를 채집하는 것이고 은수의 일은 소리를 흘려보내는 일이다. 이것이 사랑에 적용되었을 때 이들이 각자 어떤 입장에 서게 될지가 감지된다. 그렇다해도 산사에서의 깊은 밤 혹은 신새벽 눈이 오시는 소리와 풍경소리를 채집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으면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 우리 인생에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에게 정색을 하고 이 장면에서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완전히 불필요하다.

하긴 은수는 왜 그러합니까? 혹은 상우는요? 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다. 보고 느끼는 것.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는데도 저 이야기를 타인의 이야기라고 돌리지 못하는 것은 영화 속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내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상우의 아버지도 고모도 할머니도 각기 우리 보편적인 인생들의 한 단면을 무게있게 재현하고 있다. 누구도 오버하지 않는다. 다 그러함직하기 때문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거기 그렇게 무연하게 서 있는 상우와 은수를 누가 미워하겠는가. 자신의 이야기, 게다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느꼈는데 딱 한마디로는 설명이 안 되었던 그런 내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고 말하는 상우를 보며 나도 언젠가 나를 저버리려는 누군가를 향해 저 말을 내뱉었거나 뱉고 싶었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상우를 저버리려는 은수를 보며 저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저버렸거나 지금 저버리고 싶은 나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그 사이엔 잔인한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모든 첫 마음을 변색시키는 속성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하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간다. 잊을 수 있기 때문에. 하물며 사랑 따위가 어찌 버틸 것인가. 가장 찬란할 때 죽지 않은 이상 그 순간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주고 난 다음엔 사랑은 무엇을 주는가. 상우의 마음이었으면 좋겠으나 대개는 은수의 마음을 준다. 균열을 일으키며 휘청거리다 헤어져, 라고 말하는 은수를 보며 관객은 그래, 나도 그랬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온 너를 이슬을 맞아가며 기다리기도 했으나, 네 앞에서 종아리 털을 뽑아도 될 만큼 네가 익숙해진 뒤엔 지겹기도 했지, 네가 나를 다른 삶으로 데려가 줄 사람 같지가 않아서 너를 저버리려 했지, 그런 내가 이기적이고 싫기도 했지, 라고 관용과 이해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이기가 앞서는 순간 은수처럼 힘들게 다시 자신을 찾아온 상우를 두고 나, 지금 어디 가야 돼,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어디로 가버린 그녀 뒤에 남아 있는 상우의 시간이 <봄날은 간다>, 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겠는가만 결국 승자는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아서 시간을 견딘 사람이다. 은수는 떠났기에 한번쯤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저버린 사랑이었더라도 그토록 아름다웠으니 돌아와서 우리 함께 있을까?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봄날은 가버렸다. 가버린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매번 봄날이 다 가버린 뒤에나 알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신경숙/ 소설가·<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바이올렛>

"""""

'화양연화'와 '봄날은 간다'를 연작시리즈로 묶어서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었지...

(난 가끔 집에서 오밤중에 두개를 연작으로 본다... ㅡㅡ;)

두 영화를 보면 너무 되바라진듯한 현실의 사랑과 너무 영화적인 애틋한 사랑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지...

둘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건 마찬가지지만... 어떤 영화에서 이 네 주인공이 훗날 한자리에 모여서 술한잔씩 한다면 저 상황들을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회상해낼까...

↑저런영화 절대 안만들어지겠지? ㅡ.ㅡ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고 말하는 상우를 보며

나도 언젠가 나를 저버리려는 누군가를 향해 저 말을 내뱉었거나 뱉고 싶었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상우를 저버리려는 은수를 보며

저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저버렸거나 지금 저버리고 싶은 나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겠는가만

결국 승자는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아서 시간을 견딘 사람이다.

은수는 떠났기에 한번쯤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저버린 사랑이었더라도 그토록 아름다웠으니 돌아와서 우리 함께 있을까?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봄날은 가버렸다.

가버린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매번 봄날이 다 가버린 뒤에나 알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난 신경숙씨의 소설보다 이 잡지에 기고된 이런 글틀이 참 좋았다...^^

""""


둘이 헤어졌다... 다행이다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女子에게 少年은 부담스럽다
아직도 십센티는 더 클 것 같은 소년 유지태와 이제는 사랑을 조롱할 수도 있을 만큼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여자 이영애가 커플이 돼서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는 게, 처음부터 나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둘은 헤어졌다. 다행… 이다.

한때는 상우처럼, 지금은 은수처럼.
이제는 기억도 아련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때,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영화 속의 상우 같았었다. 그처럼 유머를 모르고, 눈치 없고, 맹목적이고, 답답했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 하나, 눈오는 날 추리닝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그의 집 창문 앞에서 오기를 부리며 떨고 있던 내 모습.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은수처럼 표독(?)했었다. 꽁꽁 언 발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는 끝끝내 제 방으로 나를 이끌지 않았다.

이별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미 했으니 그뒤의 감정수습은 모두 내 몫이라는 투였다. 당시엔 그 상황이 너무도 서러워 코끝이 빨개지게 울었었는데, 이제 그 추억은 그냥… 멋적을 뿐이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혀지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여자로 혹은 남자로 성장한다. 누구는 그러한 성장을 성숙이라고도 하고, 타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무조건 어른이 되고 싶던 비린 미성년 시절, 나는 찐한 사랑 한번에 여자가 될 줄 알았었고, 실연은 절대로 안 당할 줄 알았었다. 이제는 그런 내 바람들이 당치 않은 기대였던 것을 안다. 사람들은 언제나 당면한 입장에 서서 상황을 이해하는 생리가 있다. 상우의 나이를 지나 은수의 나이에 서니, 상우보단 은수가 이해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순리다.

‘라면이나 먹자’, ‘자고 갈래’라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은수의 말을 이해 못하고 정말 라면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상우는 어쩌면 처음부터 은수에겐 버겁게 순수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날긋하게 닳은 여자에게 순수는 반갑지 않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 사랑이 운명이나 숙명이 아닌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믿는 대개의 경험있는(상대를 바꿔가며 사랑의 열정을 몇번씩 반복해서 느껴본) 사람에게, 순수는 정돈된 일상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사랑을 좀 슬게 한다.

상우의 순수가 은수의 일상을 방해하고 사랑을 버겁게 느끼게 하는 요소는 곳곳에 있다. 늦잠을 자고 싶은데 상우는 제가 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새벽녘 서울에서 강릉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포옹을 요구하며, 맨정신으로 약속을 하고 찾아와도 안 만나줄 판에 술 취해 급작스레 찾아와 철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른다, 게다가 엉엉대며 울기까지. 그 대목에 이르면 은수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은근슬쩍 짜증이 인다. 저만 아프고 저만 힘들지. 어린 남자는 그렇게 이기적이다.

사랑만 하기에 인생은 너무도 버겁다
다수의 사람들은 은수가 상우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현실적인 가치기준의 잣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박봉에 초라한 개량 한옥에서 사는, 홀시아버지와 매서운 시고모를 옆에 두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모셔야만 하는, 정말 누가 봐도 최악의 결혼조건을 가진 그 남자와 연애는 몰라도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계산이 은수에게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이유에 반박한다. 은수는 그 남자의 처지보다 순수가 버거웠을 것이다. 사랑이 변하고, 권태가 일상이 되고, 키스도 무료해지고, 생계가 치명적인 걸 이미 아는 여자에게 사랑만이 전부인 남자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 나이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상우처럼 묻는 남자가 내게 온다면, 나 역시 은수처럼 당연히 그 남자를 피해갈 것이다. 아직도 사랑이 안 변한다고, 사랑이 전부라고(직장마저 그만둘 만큼) 생각하는 남자와 격한 인생의 긴 여정을 어찌 헤쳐나가겠는가. 은수와 상우의 결별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즈음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은 그닥 반갑지 않은 일이다. 안 그래도 적은 배우진이 너도나도 영화를 한다고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소원해서 될 일이라면 한국영화의 추락을 두손 모아 기원이라도 할 판이다. 그런 내 기원을 영화 <봄날은 간다>는 무참히 만든다. 드라마가 살길은 영화의 추락이 아니라 드라마의 발전밖엔 없다는 결론이 씁쓸하게 나를 채찍질한다.

 

노희경/드라마작가·<바보같은 사랑>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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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노희경씨의 감상이 참 맘에 들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어느정도 공감도 가고 이해도 가고... 그랬달까?

아니... 어쩌면 내가 노희경씨한테 비난(?)을 받는듯한 기분도 들어서 뜨끔했달까... ㅡㅡ;

영화보면서는 '원하는걸 정확하게 표현하지않고 이래저래 돌려말하는 은수같은 저런 애매모한 스타일 정말 짜증나! 난 저런스타일 증오해!' 하면서도 말이다...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보면서는 '女子에게 少年은 부담스럽다'는 말이

'男子에게 小女는 부담스럽다' 로 자연그레 변주되어 적용 될 정도로

글에 대한 느낌이... 기억의 잔상이... 꽤 강렬했달까...^^

무엇보다 둘의 헤어짐이 다행이라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사랑만이 전부인 남자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라는 말에 동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번쯤은 사랑만이 전부일수있는 그런 사랑을 꿈꾸는게 사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