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좀보고 웅얼웅얼
[책]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by soulfree
2007. 4. 2.
5월의 어느날에 수많은 깨달음의 말을 한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결국... ㅡㅡ;;;
일본의 영화들... 소설들... 참 섬세하고 담백하다.
사소한 일상들을 묘사하면서도 그 평범함을 표현함에 있어 우아함까지 느껴진달까나...
평범하지만 우아하다? 뭔가 어울리지않는 조합이지만...^^
어쩜 그렇게 사소하게 섬세한지... 작은 부품하나도 소흘히 만들지않는 일본 캐릭터 상품들을 보며 내뱉는 탄식같은 감탄을 영화나 책을 보면서도 하게된다.
제품을 보며 하는 감탄과 다른점이 있다면... 그게 감탄과 열광으로 끝나지 않는다는거...
다 읽고나면 뭔가 심심하달까... 뭔가 좀 모자란듯한 느낌이었지...
아~ 좋은데? 하는 부분들은 많지만 눈물찍~콧물찍~하는 뭉클함은 좀 결여된듯한...
도쿄타워도 살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좀 아쉽네하는...
일본의 만화책이나 소설이나 드라마나 무얼봐도 늘 항상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주 나오는 '폐 끼치면 실례지~', '죄송합니다'...
가끔 길에서 어깨를 부딪치고도 그냥 지나가는 무례함을 볼때면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그냥 뭐 그럴수도 있지~하고 넘어가지는데 일본의 저 죄송합니다는 뭐랄까... 확 질린달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엄니~' 와 '~~한댜~'하는 어미...^^ 중독성 강하다! ^^
번역서에 이렇게 사투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말투로 나오는건 첨이지 싶다~^^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 릴리 프랭키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건 간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어도, 혹은 거의 만난 일조차 없어도 부모와 자식이 '부모자식'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달라지는게 없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말이 되면 그 관계는 '부모자식 사이'만큼 간단하지 않다. 단 한 번, 불과 몇 초의 사정으로 부모자식의 관계는 미래영겁까지 구속되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생활의 답답한 토양을 바탕으로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거듭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기도 하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람도 단 한 번, 단 몇 초의 다툼으로 간단히 무너지고 마는 일이 있다. '부모자식'은 계속해서 덧셈이지만 '가족'은 더하기뿐만 아니라 빼기도 있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희곡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온갖 성실한 것 중에서도 결혼이라는 놈이 가장 장난을 많이 친다.' '부모자식'보다 더욱 더 간단하게 이루어져 버리는 '부부'라는 관계. 그 간단한 관계를 맺은 것뿐인, 장난질을 친 남자와 여자가 일이 흘러가는 과정상 부모가 되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어려운 관계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아무 일 없는 듯,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먼지를 밖으로 쓸어내지는 못해도 방구석에 밀어놓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이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연극 소품같은 '가정'정도는 만들어 준다.
하지만 가족관계란 몹시 신경질적인 것이다. 무신경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일수록 실은 세심한 신경이 필요하다. 금이 간 거실 벽, 가령 이미 눈에 익어버려서 그것을 웃음거리로 바꿀 수 있다 해도 거기서 확실하게 바람은 들이닥친다. 웃고 있어도 바람은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빨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금간 곳을 메우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금간 곳을 부끄럽게 느끼지않으면 안 된다. 뭔가 역할을 가진,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나, 부모로서의 나. 아내나 남편을 가진 나. 남자로서의 나. 여자로서의 나. 모든 것에 그 '자각'이 필요하다. 끔찍하게 귀찮고 무겁기 짝이 없는 그 '자각'이라는 것. 그 자각이 빠져버린 부부가 쌓아올린 가정이라는 모래 위의 누각은 비바람이 몰아치면 한 차례의 파도에도 허망하게 휩쓸려나가 모래사장에 가족의 사해만을 남겨놓은 채 사라져 버린다. 모래에 쳐박힌 조개껍질처럼 어린 아이들은 그곳에서 물결의 행방을 지켜본다. 그리 쓸쓸한 것도 슬픈 것도 아니다. 그저 엄청나게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을 뿐, 아이는 그 상황이나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뛰어난 연기력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약한 생물이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갖추고 태어난 본능이다.
'부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지 못할 일이 있다.' 자주 듣는 말이다. 분명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 당사자만 모르고 있는 둘만의 일'은 어린 아이나 타인의 냉정한 눈에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있다.
5월에 어느 사람은 말했다.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
가난은 비교할 것이 있을때 비로소 눈에 띈다. 이 동네에서 생활보호를 받는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이나 사회적인 지위는 달랐어도 객관적으로는 어느 쪽이 더 여유있게 사는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부자가 없으니 가난뱅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쿄의 엄청난 부자처럼 유독 두드러진 존재만 없다면, 그 다음은 죄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것이어서 누구든 먹고 살기 힘든 정도가 아닌 한, 필요한 것만 채워지면 그리 가난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하나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젠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도 도쿄라는 무대에서 듣게 되면 관념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말 그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절절히 든다. 필요 이상으로 지니고 사는 도쿄 시민들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이들, 계단 위에 앉아 원가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낮잡은 적이 있었던가? 돈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는 전혀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그 동네에는 눈꼽만큼도 떠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
개발 붐을 탄 패션빌딩에 들어선 어중간한 레스토랑에 줄을 서면서까지 기어들어가 어중간한 식사와 어중간한 와인을 마신다. 착취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 무시무시한 승부가 명확히 색깔별로 분류되는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나 판단력이 함몰되고 마는 모습에 빈곤은 떠도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그런 도쿄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가난하고 서글픈 것이다.
'가난'이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의 '볼품없는 가난'은 추함을 넘어 이미 '더러움'에 속한다. |
이 세상에 사랑이 많아도 아이를 귀애하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은 없으니.
자식이 부모 슬하를 떨어져 나가는 것은 부모자식의 관계보다 더한 무언가를, 눈부시게 향기로울 터인 새로운 관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친구, 동료, 연인, 부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제각각 아름답고도 확고한 관계를 꿈꾸고 원한다.하지만 그런 관계를 바라면 바랄수록 낙담의 씨앗이 된다. 실망에 빠지고,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다. 따스하고 대담하고 변심하지 않고 바뀌지 않을 그것을 찾아다녀도 현실은 번거로움과 배신의 벽 속, 네발로 북북 기며 두 손으로 모래를 헤집고 눈물을 흘리며 손톱에 피가 나도록 찾아 헤매도 찾아낼 수 없다. 비관하고 포기하려 해도 환상은 그런 마음을 꽁꽁 얽어매고 착각과 환각을 자주 보여주면서 다시 그 벽 속으로 끌어들인다. 몇 번이고 똑같은 절망을 되풀이하게 한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빙글빙글 빙글빙글 그리고 완전히 소진되고 질질 끌려들었다가 내동댕이쳐진다. 너덜너덜해진다. 그런 때, 아이는 부모가 된다.
인간이 태어나 맨 처음 알게 되는 부모자식이라는 인간관계. 그보다 더한 무언가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났지만, 결국 태어나서 처음 알았던 것, 처음부터 그 곳에 당연한 일처럼 있었던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고도 강력하고 결코 뒤집히는 일이 없는 관계였다고, 마음에 가시를 찔려본 후에야 가까스로 깨닫는다.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랑이 있으나 부모가 아이를 귀애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 사랑을 원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주는 입장이 되어 보고서야 겨우 조금씩 깨달아간다. 예전에 부모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가. 그날의 일을 깨닫고, 지금에야 나 자신이 그것과 똑같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때, 인간은 확실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것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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