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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ど) Empathy

인생 안으로 부정합이 걸어들어올 때

by soulfree 2006. 7. 23.

인생 안으로 부정합이 걸어들어올 때  | 소설가 권리

씨네21 558호 (2006.06.20 ~ 2006.06.27)  '이창'

http://www.cine21.com/Magazine/mag_pub_view.php?mm=005003003&pageNo=1&mag_id=39565>


얼마 전 대학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몇년 만에 본 친구들의 입에서 먼지 쌓인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다섯 친구 중 셋 정도 결혼한 그룹의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 틈에 유부녀 대 무부녀로 갈리게 된다.

유부녀가 다수일 경우, 대화의 주도권은 그녀들이 선취한다.

반지 하나를 보고도 ‘예쁘네?’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들은 뭐든 구체적이다.

플라티늄이네, 백금이네, 하던 반지 이야기를 드리블해가던 그녀들은 마침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혹은 남편 이야기로 골인한다.

오, 많은 시간이 흘렀어.

무부녀들은 침묵에 빠진 채 유부녀들과의 간격을 시간으로 환산해 재고 있다.

 

예전에는 그런 수다들이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누가 어디서 옷을 30% 할인해서 샀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싸게 먹는 방법이든,

내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자극을 주지 못했다.

늘 식탁 한구석을 차지하는 김치처럼 식상했으니까.

스무살 무렵, 내게는 브라질의 수비벽만큼이나 견고한 신념 같은 게 있었다.

살이 찌면 지력(知力)이 줄어들어, 명품을 들고 다니는 애들은 다 머리가 비었어,

서정시는 감정의 낭비이고 사치야, 축구는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돼, 라는 식 말이다.

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벌인 일들도 많았다.

그 시기, 나는 자기 세계가 강한 친구들과 만나려 애썼다.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사람에게는 배울 만한 어떤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은 아니었지만 100% 진실도 아니었다.


세계가 강한 사람들은 저마다 독성 강한 가시를 갖고 있다.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카리스마에 감탄하게 되지만, 거리를 없애고 보면 그 결벽증에 상처 입게 된다.

지금은? 내 주위에는 그런 친구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환상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제 의식주를 챙기는 것은 내게 중요한 일이 되었고, 살찐 것이나 명품을 들고 다니는 것이 지력이나 머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밤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시들에 빠져들며, 마감이 임박한 오늘밤에는 브라질과 크로아티아의 문자 중계 화면을 눈으로 따라가기 바쁘다.

이것이 과연 내가 알고 있던 나인가?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중2 때였던가.

부정합이란 것에 대해 배운 것이.

사전을 찾아보기로 한다.

‘상하로 겹쳐진 두 지층의 형성 시기 사이에 커다란 시간 간격이 있는 일.’

내 인생 안으로 부정합이 걸어들어온 것일까?

스무살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놓여 있던 고리가 끊긴 느낌이다.

스무살의 나는 작고 초라했지만, 지금은 만지고 느끼고 맛볼 수 없는 열정과 용기 같은 게 있었다.

무모했고 또 그만큼 치열했다.

그때의 나를 도로 찾아올 순 없는 것일까?

나는 부정합이 되어버린 기억의 단층들을 접합시키려 애써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단층들의 접합 부분은 뭉툭한 비명을 지르며 서로 멀어질 뿐이었다.


시간은 힘이 세다.

기억을 단절시키기도 하고 추억을 없애기도 하며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마음의 ‘켜’를 늘려준다는 것일 것이다.

켜는 ‘포개어놓은 물건의 하나하나의 층’이란 뜻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섬세하고 무언가 풍부해지는 반면, 또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마도 이 켜의 무게 때문인 듯싶다.

켜들은 나이가 들수록 방금 케라시스한 머리칼처럼 한올 한올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켜의 수가 늘어날 때, 우린 우리 안의 부정합과 만난다.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을 용인하게 되고 아프지 않았던 것들이 아파온다.

이런 단절감 때문에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언젠간 그것 역시 나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난 내 안에 새로 이사온 나를 외면하거나 멀리 쫓아내지 않을 생각이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위로해줄 것이다.

설령 서른이나 마흔 따위의 숫자상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그 시간에 그가 날 떠날지라도,

난 과거의 내가 떠난 자리에 남은 켜들을 쓰다듬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저런 시기를 거치면서 권리씨가 표현한 마음의 '켜'를 느끼는걸까?...

잡지에서 이 글을 읽는데 공감 90%

그래그래... 나도 저랬었다...

유부녀들과의 식상하고 시시콜콜한 시댁얘기 쇼핑얘기가 난무하는 대화가 최고의 시간낭비같았고 결혼과 함께 그렇게 똑같이 변해가는 그녀들이 나름 안타까워보이기까지 한적도 있었지...


결혼과 함께 완전 나태해지는구나...

실생활에서 아무 시도도 하지않으면서 스스로에게 관대(?)한거면서 예전의 자기모습을 잃었다는 모순된 불만만 하늘을 찌르는구나...

예전엔 저렇지 않았던(?) 친구들조차 사회생활 단절과 함께 저런 보통 '동네 아줌마들'의 무리속으로 빠르게 적응해가는구나...

나 역시도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더란다...


그런데...

20대 후반엔 조금씩...

서른을 넘으면서는 거의 매일... 나 역시 저런 켜들의 존재를 느끼며 많이 여유로와지고 예전처럼 아등바등하지않는 내가 한심해지기보다 나 스스로의 넉넉함에 만족하고 좋아지고... 그랬던것 같다...

스스로 '박진주 인간다워졌어~'이러면서...^^

그러면서 엄마의 시시콜콜한 수다들이 좋아졌고 엄마가 그동안 말씀하셨던 소소한 일상들이 우스워지지않았고... 그 속에서 엄마가 살아오신 삶들이 애틋해졌고...

그랬었던것 같다...

엄마가 무조건 엄마여야 하는게 아니라...

아빠가 원래 아빠였던게 아니라...

엄마도 여자였구나... 엄마도 엄마가 있는 딸이었구나...

엄마아빠는 내 나이때 대체 어떻게 가정을 꾸리시고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길러내신걸까...

내 맘대로 하고싶은게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이런걸 다 포기(?)하고 그렇게 사신걸까? 설마 우리 때문에???

이런 모자란 자식들이라도 자신의 핏줄들이라 마냥마냥 예뻐서?

이런걸 생각하게되는 순간부터 무시로 마음이 습격당하고 안습모드가 게릴라처럼 불쑥불쑥 침공하고 그랬던것 같다.


이런 마음때문에설까?

부모가 된 친구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친구들을 보면 괜히 응원해주는 맘이 되곤한다...

예전 20대의 버르장머리없고 뭘 몰라도 한참 모르던 시절의 나라면 전혀 현실감없는 이론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교육론만 입이 닳도록 읊어댔을텐데... 쿠쿠쿠...

이젠 내겐 없는... 나는 겁부터 내는 일상적인 고민들을 하는 그들을 보면 참 예쁘게 보인단다.


내가 이것 생각을 하게 된것도 남들보다 늦된걸까? ㅡㅡa

에이~ 좀 늦었음 어때~^^

이제라도 알게되고 느끼게 된게 어딘데~ 그치? ^^



http://sum.freechal.com/soulfree/1_16_32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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