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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ど) Empathy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by soulfree 2007. 3. 9.

한겨레에서 주로 문화쪽 기사를 쓰는것 같던데...
기사보다가 맘에 들어서 보면 신윤동욱 이거나 김은형 기자의 글이 많았다는...
씨네21 에서는 김혜리 기자의 글을 한겨레21 에서는 신윤동욱 기자의 글을 좋아라~~하지... ^^

1. 몇해전 어머니 아버지 성을 같이 붙여쓰는 운동에 나도 혹해서 내 이름도 바꿔볼까 생각해 봤지만...
난 그렇게 하면 '임박진주' 거나 '박임진주'거나... ㅡㅡ;;;;
푸하핫... 내가 내 이름보고 너무 웃어버려서... ㅡㅜ
나는 절대 신윤동욱같은 자연스런 이름이 안되는걸 알고 바루 포기해버렸다는... ㅡㅡ;;;;
말하자면 4자로 이름을 늘여쓰는 '이유'보다, 4자로 늘였을때 우스꽝스러운 내 이름의 '어감'이 내겐 더 큰 결정권을 가지게 했던거다.
기자가 표현한 '진심이 바뀌는것보다 겉치례 시민상식에 더 혹해하는'... 나는 그런 부류인가보다...

2. 내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라는 표현이 친숙하게 다가왔던 때가 아마도 [슈렉]을 처음 봤을때였을거다.
[슈렉]을 놓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평론가들이 하나같이 하던 말이 있다.
디즈니의 구태의연한 강박적 해피엔딩과 달리 [슈렉]은 스토리텔링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올바른 애니메이션이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신선하지 못한 판에 박힌듯 똑같은 영화평론을 읽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라는 표현만큼은 내게 참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달까?
이런 표현을 정치판이 아니라 이런곳에서도 쓸수가 있는거였네?
오오... 그래...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음... 멋진데?
근데... 이 기사 읽고... 나의 일상다반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건가? ㅡㅡa
나의 의식구조는? 나의 언행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난 금새 단무지 아카데미스럽게 '아~ 피곤한데~' 가 절로 나오더라는...
의식적으로 사는건 피곤하다. 내겐 너무나 피곤하고 신경쓰이는 일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않으면 어떤가...
그래도 나는 나인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않아도 얍삽하게 겉치레 시민상식에 혹해서 사는게 '나'라해도... 그게 내게 자연스러운거라면... 그냥 나는 '나대로 사는게... 내겐 그게 최고이고 최선이다' 라며 손쉬운 자기합리화의 세계로 도피... 피융~피융~(이미 달나라로 떠났다~ ㅡㅡ;;;;)
난 멋지게 사는것보다 내가 자연스럽게 사는게 더 좋다 라는 그럴듯한 자기합리화 방어책!!...
근데 방어책이 맞긴 맞는건가? ㅡㅡa

3.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 이거 내가 무쟈게 즐겨쓰는 표현인데
여기서 이렇게 읽으니 완전 찔리는데~~ ㅡㅡ;;;;

말이 바뀌면 뭐하나 진심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렇게 ‘게이’라는 말에 묻은 겉치레 시민적 상식에 짜증이 났었다. ---> 또 푹.....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했지만 진심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혐의를 품었다 ---> 내 얘기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름으로 포장했지만 진심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인간...

융통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설득할 용기가 없어서다. ---> 또 푹.....

이렇게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아니 가능한 것인가, 생각에 빠진다. ---> 공감

나의 언어생활에는 몹시도 관대하지만, 남들의 언어생활에는 여전히 깐깐하다. ---> 또 푹푹.....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장애우’라는 표현에는 타자화의 느낌이 있어서 ‘장애인’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의 ‘장애우’라는 표현의 애용에는 언어로만 장애인을 대접하는 현실이 강하게 겹친다.
우리가 장애인 복지에도 그만큼 깍듯한가 ---> 공감

외국인을 만나서 짧은 영어와 무의식을 알리바이로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어놓고, 국적차별 아니야,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다. ---> 맞다... 어느나라에서 왔어? 라고 물을때부터 이게 단순한 궁금증인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고... 어느나라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나 역시도 그 GNP 차별을 하는 한국인임을 느끼고 스스로 서글퍼 한다는... ㅡㅜ
겉으로는 '난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프랑스에서 왔어"와 "방글라데시에서 왔어" 했을때 내가 갖는 선입견과 호감의 차이가 느껴지는걸...
노르웨이에서 발매되는 음반과 우간다에서 발매되는 음반을 고르라면 당연스레 노르웨이걸 집는걸...
이걸 취향의 차이라고 우길수도 있겠지만... 이게 과연 정말 단지 '취향'의 차이 일뿐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생각하면 별로 떳떳한 기분은 아닌지라.... ㅡㅡ;;;
나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혹은 의식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박노자교수가 말하는 '인종차별보다 더 유치하고 잔인할수 있는 나라별 GNP 차별'을 하고 있는 한국인 중 하나임에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에 도달할 뿐이라는... ㅡㅜ

정치적으로 섬세하기가 어려워, 강박에서 슬쩍 풀어놓는 잔재주를 부리지만,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반성을 부른다. --->반성이라기보담...저러저러해서 바루 더이상 생각하기를 포기쪽으로... ㅡㅡ;;;;

이렇게 강박과 위반과 반성의 교차로에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다. ---> 나 역시... ㅡㅡ;;;

이런다니까... ㅡ.ㅡ
신윤동욱 기자의 기사를 읽다보면 막 찔리고 막 공감하고 그러다가 '맞아맞아~ 나도 그래~' 이렇게 끝나는게 다반사... 
게다가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파파팍!! 와닿게 잘 표현해낸달까...^^
쿠쿠쿠....

그나저나... 저런 말들이 푹푹... 나를 찌르네... 쩝...
난 자학을 하다못해... 이젠 이런 기사를 읽으면서까지 자학 극대화 시키는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캬캬캬... ㅡㅜ

출처>> 씨네21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44442&mm=005003003

[이창]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2007.02.09 신윤동욱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일까? 무쓸모 의심은 무쓸모 행동을 낳았다.
몇해 전 누군가가 “뉴욕에서는 ‘호모’라는 말이 쿨한 말이 됐대”라고 말하자, 나의 언어생활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호모”라는 말을 쓰기가 다반사.
처음엔 이랬다.
한국사회의 언어생활이 그래도 교정돼서 상식이 있는 사람과 매체라면, 더이상 ‘호모’라든가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자(아직도 쓰는 용감한 분들도 있다), 괜히 반감이 일었다.
이건 너무 쉽잖아, 말이 바뀌면 뭐하나 진심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렇게 ‘게이’라는 말에 묻은 겉치레 시민적 상식에 짜증이 났었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했지만 진심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혐의를 품었다.
그러니까 때이른 언어의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포장하자.
정치적으로 포장을 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서 올바른 체하는 자신에 대한 조롱도 없지는 않았다고 해야겠다.
물론 남들과 같아졌다는 짜증이 2할, 쿨하다는 잘난 체가 8할이었다.
이렇게 충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되기도 전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지루함의 증거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유행이 되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신념에 근거해 서로를 슬며시 ‘야렸다’.

말은 무섭게 달린다.
말은 금지선을 넘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꾸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갔다.
나의 말과 너의 말이 오가면서 더욱 무섭게 달렸다.
그래서 이제는 몇 가지 문제성 발언은 입에 익어서 엉뚱한 장소에서 심란한 단어를 뱉어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순간에 말을 뱉고서 ‘정말로 입조심해야지’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물론 말맛을 살린다는 나름의 취지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는다.
물론 반성의 순간도 있었다.
아직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어를 용인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에 면죄부를 주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경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딜레마에도 부딪힌다.
심야의 사무실, 경비 아저씨가 다가와 묻는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신윤동욱입니다.”
“아, 네 신윤동씨요.”
“아니… 어머니 성을 같이 써서 이름이 네자고요. 신.윤.동.욱. ….”
이름을 끊어서 말하며 과연 잘하는 짓일까, 회의도 생긴다.
기자일의 특성상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낯선 고령자에게 이름을 소개해야 하는 경우도 난감하다.
그래도 몇번을 “신윤동욱”이라고 반복하다 상대가 “신윤동? 신동욱?” 하면 대충 “네” 해버린다(포기도 따지면 나이 차별이다).
융통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설득할 용기가 없어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아니 가능한 것인가, 생각에 빠진다.
정치적 올바름의 코드를 전혀 모르는 카자흐스탄 킹카 보랏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몹시도 웃긴 일이라는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의 설정처럼. 생각해보니 웃기다.
“여자의 뇌는 다람쥐만하다”고 말하는 카자흐스탄 킹카 보랏에게 부모성 같이 쓰기를 설명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랏!

나의 언어생활에는 몹시도 관대하지만, 남들의 언어생활에는 여전히 깐깐하다.
어쩌다 “동성연애자”라고 쓰여진 활자를 보면 짜증이 치밀고, 심지어 라디오에서 “장애우”라는 말이 들려도 귀에 거슬린다(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장애우’라는 표현에는 타자화의 느낌이 있어서 ‘장애인’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의 ‘장애우’라는 표현의 애용에는 언어로만 장애인을 대접하는 현실이 강하게 겹친다. 우리가 장애인 복지에도 그만큼 깍듯한가).
서너해 전, 경찰서 기자실에서 들었던 어떤 기자의 말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다수인 사람들한테 ‘비’자를 붙이는 게 말이 돼. ‘비장애인’이 뭐야.”
그는 들으라는 말이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투에서 풍겼던 주류의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도 방송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고 리포트는 했겠지.

질문을 고민했던 순간도 있었다.
외국인을 만나서 짧은 영어와 무의식을 알리바이로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어놓고, 국적차별 아니야,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섬세하기가 어려워, 강박에서 슬쩍 풀어놓는 잔재주를 부리지만,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반성을 부른다.
이렇게 강박과 위반과 반성의 교차로에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다.

http://sum.freechal.com/soulfree/1_16_33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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